𝕄𝕠𝕧𝕚𝕖

<밀양>,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인간의 주체성 (3)

A1ee 2020. 9. 2. 03:11

* 2020학년도 여름학기 서울대학교 교양수업 <인간과 종교> 레포트로 작성했던 글입니다. 영화의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론(2)

2. 종교의 배신과 인간의 구원

2.1. 신정론의 한계

 열심히 신을 믿으며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던 신애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 범인을 만난다. 그러나 범인의 얼굴은 온전한 평온을 찾은 얼굴이었으며, 범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었고 자신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말한다. 간신히 종교로부터 힘을 얻어 용서해주고자 찾아간 대상이, 자신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신애는 범인으로부터 고통받은 인간인 자신이 그를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극도의 배신감을 느낀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가 있어요.’

 신으로부터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한 신애는 자신이 의지하던 종교에 대한 배신감으로 다시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흔들린다. 신애는 기도 중인 교회에 찾아가 의자를 내려치고, 기도회에서 거짓말이야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틀고, 약사부부의 남편을 유혹해 육체적인 관계를 시도한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보고 있냐고 묻는다. 유일한 지지대였던 종교의 배신으로 인간에게도, 종교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보여주며 홀로 남아 타락하는 자신을 보고 있냐고 신에게 묻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는 고통 속에서 카오스를 겪는 인간을 구원하여 코스모스로 인도했지만, 인간은 종교로부터 배신당해 이전보다도 더욱 큰 카오스의 상태로 돌아간다.

 신애는 자신보다 먼저 범인을 용서한 신을 용납할 수 없다. 신애와 함께 교도소를 방문한 종찬(송강호)과 다른 사람들은 범인이 하나님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신애에게는 그런 말들이 들리지 않는다. 신애에게 신은 더 이상 자신의 구원자가 아니라 범인의 구원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정론은 인간이 용납하기 힘든 악과 고통의 문제도 신의 뜻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역으로 고통받는 현실의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신애는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타락하고 자기 자신을 해친다.

영화 <밀양>의 장면 중 하나. 신애의 곁에 있던 것은 결국 신이 아닌 인간(종찬)이었다.

2.2. 인정론(Anthropodicy, 人正論)

 영화 속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신의 사랑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똑같이 베풀어진다. 물론 온전히 신의 자녀가 된 의인은 악인에게 베풀어진 신의 은총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나,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감정을 가진 동물이다. 따라서 이때의 인간이 필요한 것은 악인에게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영화 <밀양>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끝까지 사랑의 하나님이다. 신은 악인을 구원해주었고, 교회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에게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의 사랑은 악인에게도 베풀어짊으로써 오히려 현존하는 악을 가린다. 그래서 신애는 기도를 거부하고, 현존하는 인간으로서 더욱 큰 고통에서 몸부림친다.

 이렇게 드러나는 신정론의 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통적인 신정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인류의 비극,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킨다. 신정론은 신의 사랑으로 범인이 용서된 것과 같이, 독일 나치와 같은 현존하는 악에도 신의 이름 아래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로 인해, 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반신정론(Anti-theodicy)이 등장하고, 전통적 신정론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에게 주목하는 인정론(Anthropodicy)이 등장했다. 인정론은 악과 고통의 문제를 더 이상 신이 아닌 인간의 문제로 전환하고, 철저한 인간학적 물음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인정론에 따르면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의 문제는 결국 인간으로부터 기인하며, 문제 해결의 주체도 인간이다.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신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다. <밀양> 역시 인간에게로 초점을 돌린다. 이때 우리는 종찬에 주목해야 한다. 신애는 아들을 잃은 고통 이후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갈구했지만, 신애를 늘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밀양으로 대표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감독에 따르면 종찬은 인격화된 밀양으로서 늘 신애와 함께한다.[1] , 영화는 결국 인간 신애와 인간 종찬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 앞의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땅바닥에 드리운 햇볕을 비추며 끝이 난다. 이창동 감독은 이를 통해 우리 삶의 희망, 구원이 하늘 너머가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고 밝혔다.[2] 다시 말해, 구원은 신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구원이며, 인간은 신의 사랑이 아닌 인간의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인정론적인 사고이며, 신으로부터 절망한 신애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 다시 구원받는 길은 또 다른 신이 아닌, 종찬과 같은 인간임을 암시한다.

 


[1] 이창동허문영, 이창동 감독영화평론가 허문영 대담 유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고통이다, 씨네21, 2007. 5. 15.,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46374

[2] 홍성록, ‘밀양이창동 감독 종교 아닌 인간 다룬 영화”, 한겨레, 2007.05.25.,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211666.html#csidxb130b6395c89eaeb3c91f0f3d12569d